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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과 정신병

I. 라캉의 진단법에 대한 간략한 개괄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은 세 가지 진단 범주들에 따라 정신 장애를 분류한다. DSM-5가 관찰 가능한 증상에 근거해 분류하는 것과 달리 라캉은 근본적 방어 양식(또는 ‘부정’의 양식)에 대한 구조적인 범주에 따라 구분했다. 세 가지 주요 진단 범주들은 다음과 같다.

이 같은 구분에 따르면 각각의 범주들은 각각의 메커니즘 ‘때문에’ 일어난다. 다시 말해 정신병은 폐제와 단순히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폐제로 인해서 야기된다는 것이다. 폐제는 정신병을 구성하는 본질 그 자체다.


위와 같은 인과적 구분을 한다고 해서 진단 행위가 더 간단해지는 것은 아니다. 정신병이 아닌 신경증적인 구조를 지닌 환자에게서도 정신병적인 특징이 발견될 수 있고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겉으로 드러난 증상과 담화 수준에서 각각의 범주에 따라 진단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억압’, ‘부인’ 그리고 ‘폐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진단을 위해서는 분석 수행자가 제공하는 분석 자료로부터 유추된 기저에 있는 무의식의 구조적 논리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전적으로 분석가의 경험과 숙련 그리고 노력 여하에 달렸다. 주요 임상적 특징 중 어떤 것은 환자에게서 직접적으로 발견되나 어떤 것은 상당량의 조사와 연구를 필요로 한다.


II. 상징계The symbolic와 누빔점


앞에서 라캉의 세 가지 주요 진단 범주로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을 언급했다. 그 중 정신병은 ‘폐제’가 본질적인 특징이다. 거두절미하고 설명하자면 폐제란 어떤 특정 요소를 상징계로부터 ‘완전히 추방’하는 것이다. 이 요소는 상징계 전체를 떠받치는 요소이기에 그것이 폐제되면, 상징계 전체가 타격을 입게 된다. 거칠게 말해 상징계가 없어진다. 어려운 말이 많다. 폐제를 이해하기에 앞서 ‘상징계’란 무엇이며 완전히 추방된다는 어떤 특정 요소란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원 하나를 그리고 그 원이 한 언어 안에 있는 모든 단어들의 집합을 나타낸다고 해 보자. 그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이다. 물론 어떤 언어든 단어와 표현들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므로 상징계를 하나의 원으로 표상하는 데에는 어폐가 있다. 하지만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선 이 같은 비유가 적절하다.

이렇게 한 아이는 부모의 언어적 우주(상징계) 안에 미리 확립되어 있는 장소 안으로 태어난다. 종종 아이가 세상의 빛을 보기 몇 년은 아니더라도 몇 달 전에 준비된 공간 안으로 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가 사용하는 언어를 배우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은 자신이 바라는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는 단계 – 아이가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부모들이 알아내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단계 – 너머로 나아가서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그만큼의 단어들로, 그러니까 보호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려고 시도하지 않을 수 없도록 사실상 강제된다.


즉 상징계란 한 주체에게 외래外來적이다. 상징계는 모든 말하는 주체에 앞서 존재하는 제 2의 자연이다. 그것은 쉽게 지각할 수도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내 행동을 조종하고 통제한다. 우리는 타인과 상호작용할 때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바로 이 상징계를 경유해서, 생각하고 대화하고 행동한다. 상징계는 복잡한 규칙의 네트워크와 서로 다른 전제들의 수락과 의존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 문법처럼 관습에서 파생되어 오직 부분적으로 의식할 뿐 보통 맹목적으로 따르는 규칙과 의미

● 무의식적 금기처럼 항상 따라다니지만 의식할 수 없는 규칙과 의미

● 명백히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밀쳐놓고서야 행동할 수 있는 규칙과 의미


한편, 상징계는 일반적으로 상상계The imaginary에 가려져 있다. 상상계란 ‘상상想像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각된 것, 경험한 것, 현상적인 것을 가리킨다. 상상계란 이미지 작용Imagination과 관련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체스에 비유해보겠다. 체스 판 위에는 말의 형상을 한 나이트, 여왕의 형상을 한 퀸, 왕의 형상을 한 킹, 성직자의 형상을 한 비숍 등 다양한 말이 있다. 플레이어는 여러 형상을 가진 체스 말들을 체스의 규칙과 순서에 따라 움직인다. 여기서 체스 말들의 형상이 상상계라면 체스 말들을 제어하는 규칙들이 상징계이다. 체스 말의 형상이 체스 말들을 정의한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형상 바깥에 있는 말과 관련된 규칙들이 나이트를 나이트로, 퀸을 퀸으로 정의해준다. 규칙들(상징계)은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비실체지만 체스 말(상상계)의 존재를 규정한다.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 되짚어보자. 당신도 같이 사고를 되짚어보기를 바란다. 라캉은 정신병이 폐제Foreclosure로 인해서 일어난다고 했다. 폐제는 상징계로부터 어떤 것을 완전히 추방한다는 뜻이다. 상징계는 언어 환경이자 말하는 존재에게는 제 2의 자연이나 다름없다. 상징계는 주체를 사로잡는 의식적, 무의식적 규칙 체계이다. 그렇다면 폐제로 인해 상징계로부터 추방되는 이 ‘어떤 것’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은 어떤 역할을 하기에 정신병을 초래하는가. 라캉은 이 ‘어떤 것’을 ‘누빔점’이라고 명명했다.


어떤 단어에 대해서 왜 이 단어가 그것으로 불리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사과를 왜 사과라고 부르고 딸기를 왜 딸기라고 부를까 하고 말이다. 끝없는 의문을 따라 단어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의 언어와 의미 체계, 상징계는 순수하게 우연적인 과정으로만 가득 차있는가. 라캉은 상징계가 순수하게 수행적이고 우연적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고정해주는 어떤 정박점, 참조점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것을 ‘누빔점’이라고 부른다.


누빔점에 대한 설명에 앞서 기표와 기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언어는 기호 체계이며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구성돼있다. 일반적으로 기표와 기의는 안정된 결합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이를테면 ‘사과’라는 기표는 대개, 주먹 크기 정도의 빨간 색의 단단한 육질을 가진 달콤한 과일이라는 기의와 결합되어 있다. 하지만 라캉은 언어의 기본 구성단위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물인 기호가 아니라 기표라고 했다. 라캉에 따르면 기표는 기의의 우위에 있으며 기의는 오로지 기표 간 변별적 차이로부터 사후적으로 파생될 뿐이다.

기표는 기의의 우위에 있으며 기표 간 변별적 차이로부터 기의가 사후적으로 발생한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예시를 통해 이해해보자. 다음을 상상해보라. 책장에 아홉 권의 책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아홉 권의 책은 순서대로 꽂혀있다. 책 주인이 책의 순서가 섞이지 않도록 숫자가 적힌 라벨을 붙인다. 그런데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책은 아홉 권인데 라벨을 다음과 같이 붙인 것이다.

1부터 9까지 라벨을 붙여야 하는데 1부터 10까지 라벨을 붙여버린 것이다. 그것도 3이 빠진 채로! 상심하던 책 주인에게 곧 손님이 찾아온다. 집 주인의 멋진 책장을 둘러보던 손님은 무언가 하나 빠져 있음을 눈치 챈다. 그는 집 주인에게 묻는다. “3권은 어디 갔나요?” 3권은 어디 갔는가. 아니, 그가 진짜 궁금해야 할 것은 3권이 어디로부터 왔는가이다. 그는 왜 3권을 찾는가.

3권은 없다. 책 주인이 숫자 라벨을 붙이기 전이든 후든 3권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3권이 있었던 –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있었어야 할 – 빈자리이다. 숫자 라벨 2에 뒤이어 오는 숫자 라벨 4는 숫자 라벨 3을 그리고 열권의 책 중 세 번째 책의 존재를 승인한다. 일단 승인된 3권은 지금 이 자리에는 없지만 어딘가에는 있는(적어도 손님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실체가 된다. 2와 4라는 두 기표의 변별적인 차이로부터 3권이라는 실체가, 의미가 발생했다. 이 세 번째 책은 숫자 라벨을 붙이기 전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숫자 라벨이 붙여진 이후에 어딘가에 사후적으로 존재케 되었다.


라캉은 모든 의미가 설명했던 바와 같이 기표의 변별적 차이로부터 사후적으로 발생한다고 했다. 기의는 기표 없이 있을 수 없으며 기표와 공고한 결합 관계에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첫째, 근본적으로 기표와 기의 사이의 결합 – 편의상 결합이라 표기했으나 이제는 알지 않는가, 엄밀히 말해서 결합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을 – 은 우연적인 데다가 둘째, 기표 연쇄의 조그만 변동만으로도 의미작용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빠진 숫자가 3이 아니라 7이었다면 어떠했겠는가.


이제 기표와 기의가 뭔지 이해했다. 언어(상징계)의 기본 단위는 기표이며 기표는 기의의 우위에 있다. 기의는 기표 간 변별적 차이로부터 사후적으로 발생하며 때문에 기표와 공고한 결합 관계에 있지도 않다. 이제 누빔점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또 다른 예시를 통한 이해를 위해 잠시 원시 시대를 상상해보자. 인류는 아직 우리가 아는 바로서의 모습과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원시 인류의 목청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곤 분절되지 않은 날 것의 소리들이다. 어느 날 원시인 A는 좋을 때 ‘아’라는 소리를, 싫을 때 ‘가’라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원시인 A는 자식을 많이 낳는다. 정말 많이 낳아서 무리 대부분이 A의 자식들로 채워진다. A 무리는 이제 모두 좋을 때 ‘아!’라고 소리 지르고 싫을 때 ‘가!’라고 소리 지른다. 그러다 A의 수많은 자식들 중 하나인 B가 불만을 가진다. B는 좋을 때 ‘가’ 싫을 때 ‘아’라고 소리 지르고 싶기 때문이다. B는 이내 정말로 좋을 때 ‘가’ 싫을 때 ‘아’라고 소리 지른다. 곧 A의 무리들은 B를 무리로부터 추방한다. 소리를 이상하게 지르기 때문이다.


B는 왜 추방당했는가. 왜냐하면 모두에게 ‘가’는 싫을 때, ‘아’는 좋을 때 내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B를 제외한 나머지는 왜 그렇게 소리를 낼까. A가 그렇게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싫을 때 ‘가’라고, 좋을 때 ‘아’라고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래 그러한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복종이 있다. 왜냐하면 좋을 때 ‘아’, 싫을 때 ‘가’라고 소리 지를 특별히 합당한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 복종은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인 복종이다. 모두가 하니 그저 그렇게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B는 복종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추방되었다.

원시적 언어의 탄생이 결코 여기서 묘사된 바와 같지는 않을 것이나 요지는 분명하다. ‘아’가 ‘아’가 되고 ‘가’가 ‘가’가 된 배경에는 어떤 복종, 인정, 포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A의 무리는 ‘아’를 ‘나’나 ‘다’로 부르기를 포기하는 대신 ‘아’라고 부르는 것에 복종했기 때문에 원시적이나마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이 복종으로부터 A의 무리는 분절되지 않은 소리와 무의미의 바다 속에서 부유하기를 멈추고 기표 사슬의 의미작용 체계 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가’와 ‘아’라는 분절되어 변별적인 차이를 생산하는 두 기표 연쇄의 소급적 의미작용 과정 속 복종과 포기의 순수하게 이론적인 저 순간, 저 지점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누빔점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상징계는 규칙 네트워크, 서로 다른 전제들의 수락과 의존이다. 규칙과 전제들은 성립하기 위해 어떤 참조점을 필요로 한다. 공유된 참조점으로부터 규칙과 전제에 대한 상호 존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소간의 부정확함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누빔점이란 최초의 참조점이자 정박점이다. 결합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기표와 기의를 바늘로 꿰듯 한 데 묶어 주는 것이 바로 누빔점인 것이다. 라캉이 말한 ‘누빔점’이라는 단어는 원래 단추를 달거나 의자나 소파의 속을 채울 때 쓰이는 바늘땀을 의미한다. ‘누빔점’ 덕분에 의자나 소파의 천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고정될 수 있다. 만약 누빔점이 없다면 마치 실이 풀려버리듯 상징계의 모든 것은 해체되고 말 것이다.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누빔점에 대한 대강의 이론적 위치는 이제 알았다. 기표는 기의의 우위에 있으며 기표의 변별적 작용으로부터 기의는 사후적으로 발생한다.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기표 기의 간 의미작용을 일종의 매듭과도 같은 누빔점이라는 것이 보충한다. 누빔점이라는 최초의 지시 관계 위에서 기표와 기의의 일시적인 결합 관계가 성립한다. 상징계라는 규칙과 전제들의 집합체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발견할 수 있는 최초의 참조점이 바로 누빔점이다. 누빔점의 부재는 상징계 전체의 상실로 이어진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누빔점이 언어학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그렇다면 누빔점의 부재는 언어 장애의 일종으로 이어져야지 왜 정신병으로 이어지는가? 정신병에서 언어 장애는 일부 증상에 지나지 않지 않는가. 더군다나 라캉은 누빔점을 모든 말하는 주체의 실존적 조건으로 보았다. 애당초 주체 자체가 있기 위해서는 누빔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빔점이라는 언어학적인 그리고 순수하게 이론적인 개념이 어떻게 해서 주체 자체의 탄생과 정신병의 감각·인지 혼란에 책임이 있다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위해 오이디푸스 과정을 간략하게 알고 넘어가도록 하자.


방금 태어난 아이의 감각과 지각은 아직 분화되지 않았다. 감각과 운동에 대한 지배력의 부재, 지각에 대한 표상이 부재하는 아이에게 ‘나’와 ‘세계’에 대한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의 신체에 대한 경계는 모호하여 어머니(여기서 어머니란 반드시 생물학적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의 신체와 모호한 뒤섞임 속에 있다. 아이는 어머니이며 어머니의 세계는 아이의 세계이다. 어린 아이는 정신분석학에서 흔히 말하는 ‘원초적 합일’의 상태에 있다.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에서는 이 상태를 아이는 어머니의 페니스가 되기를 욕망한다고 표현한다. 페니스라는 용어에 겁먹지 말라. 남성 성기를 뜻하는 문자적 의미는 무시하면 된다. 페니스는 일반적으로 욕망의 대상을 뜻한다. 즉 아이가 어머니의 페니스가 되기를 욕망한다는 말은 어머니의 욕망의 완전한 대상이 되기를 소원한다는 뜻이다. 아이는 인간이자 동물이며 동물은 욕구와 충동을 가진 존재이다. 아이의 본능적 충동은 자기 자신의 생존과 안녕을 향하는데 이를 책임지는 존재가 바로 어머니이다. 어머니와 자기 자신에 대한 뚜렷한 경계가 부족한 상태에서 아이의 충동은 자폐적인 순환 운동을 한다. 아이의 어머니를 향한 충동은 어머니를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아이는 자기 자신과 어머니를 욕망하는 동시에 어머니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기를 바란다. 아이는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신체 일부인 ‘페니스’가 되기를 소원한다. 아이는 어머니의 전부가 되기를 갈망한다(이는 반대로도 그러한데, 어머니는 아이의 전부가 되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어머니의 젖을 물고 있을 때도, 안겨 있을 때도, 자신을 재워 줄 때도 어머니의 욕망의 시선은 어째서인가 자신을 벗어나 다른 지점으로 향한다. 물론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일 필요는 없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이 아닐 수도 있으며 이별 따위의 이유로 아예 부재할 수도 있다. 설령 생물학적 성별이 남성인 아버지가 있다 하더라도 라캉의 오이디푸스 구조에서 지칭하는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다. 여기서 아버지란 순수하게 구조적인 위치를 가리킨다. 아이 욕망의 원초적 대상으로서의 어머니가 욕망하고, 권위를 요청하는 위치말이다. 이를테면 ‘네가 그렇게 행동하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겠니?’ 혹은 ‘네 아버지라면 결코 좋아하시지 않을 거다’, ‘아버지는 너를 매우 자랑스러워하실 게다’에서 아버지가 어머니의 담화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바로 그러한 위치이다. 여기서 어머니는 자신을 넘어선 권위와 자신의 소망을 넘어선 이상으로서 아버지를 참조한다.


아버지의 존재는 아이의 어머니를 향한 원초적 환상에 균열을 낸다. 아버지의 존재는 아이를 위협한다. 자신의 전부는 어머니이며 어머니의 전부가 자신이기를 욕망하는 아이에게 어머니를 넘어서는 권위와 이상의 존재는 아이에게 불안을 야기한다. 어머니의 페니스가 되고자 하던 아이는 아버지로부터 거세 위협을 받는 것이다. 원초적인 합일의 욕망과 어머니의 아버지를 향한 상징적 욕망 사이 불일치의 간극 속에서 아이는 아버지라는 명사 또는 기표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받는다. 어머니라는 안락한 전-언어적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아버지라는 권위와 이상의 상징적 세계에 복종하는 것 외에 아이에게 선택지는 없다. 아이 자신이 그토록 원망해 마지않는 어머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저 아버지를 택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택하지 않은 아이에게 남는 것은 이름 없고 분절되지 않은 어머니의 욕망이라는 늪과 끝없이 침입해오는 거세 불안뿐이다. 이렇게 아버지라는 기표를 받아들인 아이는 이제 상징계 속으로 발을 디디게 되고 말하는 주체로서 탄생하게 된다. 아이의 욕망은 상징계 내 지시 관계 속에서 조절되고 이름 붙여진다.

눈치 챘겠지만 오이디푸스 과정에서 아버지의 위치가 바로 누빔점이다. 분절되지 않은 전-관념적 세계로부터 관념과 상징의 세계로 아이를 데려오는 것이 바로 아버지라는 위치, 이름, 기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누빔점은 비단 언어의 발생뿐만 아니라 욕망하는 주체의 출현 그 자체에 책임이 있다. 누빔점 또는 아버지의 이름은 존재의 본질적인 질문–‘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들에 답을 제공하거나 답을 찾도록 추동한다. 나와 타자, 아울러 세계에 대한 감각, 인지, 사고의 중핵에 있는 것이 바로 이 누빔점이다. 따라서 누빔점 또는 아버지의 이름의 폐제는 상징계를 송두리째 상실케 하며 곧 정신병에서의 감각, 인지, 사고 혼란을 초래한다. 누빔점이 폐제된 정신병 환자는 마치 실이 풀려버리듯 모든 것이 해체된다.


III. 정신병의 임상적 특징들


1. 감각 혼란: 상징계에 대한 상상계의 우위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인 아이는 자신에 대한 부모의 판단을 내면화한다. 부모나 선생과 같은 주변인들에 의해 아이에게 역반사된 일련의 자기 이미지들은 결정화되어 아이의 자아를 구성한다. 구성된 자기 이미지를 중심으로 아이는 이전에 있었던 지각과 감각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며 자신의 행동이 칭찬받을 만한지 비난받을 만한지를 평가한다. 이렇게 형성된 질서는 최초의 감각과 지각의 혼돈을 하나의 체계로 재편성하며 상상계(시각, 청각, 후각과 같은 모든 종류의 감각과 환상의 영역)는 상징계에 의해 덧쓰여진다.


하지만 정신병의 경우는 이러한 덧쓰기가 일어나지 않는다. 정신병은 거세 콤플렉스가 일어나지 않아 누빔점의 역할을 하는 아버지의 이름이 폐제된 경우이다. 여기서의 핵심은 정신병에서는 상상계가 계속해서 지배권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정신병자도 상징계에 동화될 순 있지만, 이는 상징계가 ‘상상계화imaginarized’된 것에 불과하다. 요컨대 상징계가 상상계를 재구조화한 것이 아니라 단지 타인에 대한 모방을 통해서 상징계에 동화된 것일 뿐이다.


정신병자 ‘라첼 코어데이’는 정신병이 발병한 이후로 자기를 상실하는 경험을 했다는 보고를 한다. 그녀는 자기self가 풍선처럼 하늘 높이 떠올라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당시 그녀는 무엇과도 관계를 맺을 수 없었는데, 이는 그 관계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는 것이 사라져 더 이상 지향성의 확고한 중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 자신의 육체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직장 상사와 함께가 아니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있어 그 직장 상사는 신체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육체의 신경 근육은 별문제 없이 이전처럼 복잡한 활동을 실행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의식을 상실함으로써 육체가 산산이 흩어져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종종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 자신을 꼭 붙들고 있어” 이처럼 정신병은 언어가 이름과 한계를 부과하는 기능을 다하지 못해, 상상적인 관계가 우세권을 가지고 지배하는 경우이다. 상징계에 의해 경계지어지지 않은 감각 정보들은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2. 해체된 언어와 신조어

정신병자는 자기 내면에서 어떤 목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것은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끊겨버린 문장이나 어구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문장의 빠진 부분을 메워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언어의 구조적인 특성상, 문장은 마지막 단어가 발화된 이후에야 비로소 완전한 의미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문장에서 각각의 단어나 문구는 그 다음에 오는 단어들을 위해 길을 닦아주고 먼저 온 단어들과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 이다’라는 미완의 문장에서 서술격 조사는 이미 앞에 있는 주어에 의해 예고되어 있으며, 그 사이의 빈자리에는 화자가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어떤 것이나 어떤 행위가 올 것으로 기대된다. 즉, 문장은 하나의 사슬로 이해될 수 있다. 동사는 주어에, 형용사는 그것이 수식하는 명사에, 문장의 마지막 부분은 첫 부분에 연결되어 있다. 문장 내의 요소들은 모두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서로를 위한 여지를 준비한다. 어떠한 요소도 완전히 독립적일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함께 연결되어 사슬을 이룬다(바로 이런 이유에서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라캉이 ‘기표 연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문장의 일부분만으로는 결코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의미는 오직 그 문장이 끝나고 나서야 명확해진다. 정신병자에게 들리는 단속적인 목소리들은 끊어진 말의 사슬로부터 떨어져 나온 조각난 단어와 기표들이다. 누빔점의 폐제로 인해 의미작용 능력이 결여된 정신병자들은 담화로부터 튕겨져 나온 이 단어들을 사물과 동일시한다.


한 정신병자는 누군가가 자신에게서 재산을 빼앗는 듯한strip her of her assets 공포감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이 문구와 Strip District(그녀가 방금 전에 다녀온 피츠버그의 장터), New York Strip Steak(최근 메뉴판에서 본 것) 사이의 기이한 연관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가 그런 연상은 strip이란 단어를 하나의 사물처럼 취급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그녀는 데이비드 레터만과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성 바울의 편지letter에 관심이 있는 또 한 명의 데이비드 사이에서 우스꽝스런 연관을 짓기도 했다. 한 정신병 환자는 단어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것들은 그 누구도 거기에 오줌을 갈길 수 없는 제 왕관의 보석들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에게 단어들은 누군가가 거기에 오줌을 갈길 수 있는 사물이나 마찬가지란 얘기다.


정신병자는 또한 신조어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인다는 점이 종종 지적되어 왔다. 정신병자는 기존 단어들을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자신이 표현할 수 없었던 의미를 부여한다. 보통 단어들은 기존 단어들에 의해 다시 설명될 수 있는 반면, 정신병자의 신조어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설명되거나 정의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단어의 의미는 항상 다른 의미들을 지시하지만, 정신병자가 사용하는 신조어는 기존의 다른 의미나 설명 가능한 의미를 지시하지 않는다.


- 표절문헌:『라캉과 정신의학』, 『라캉의 주체』, 브루스 핑크; 『HOW TO READ 라캉』, 슬라보예 지젝; 『라깡과 언어와 철학』, 러셀 그리그

- 발제조: 조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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