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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성 인격장애'를 통해 본 기억과 자아


영화 23 아이덴티티(Split, 2017)에서 제임스 맥어보이는 해드윅, 패트리샤, 데니스, 베리, 케빈 그리고 비스트 등 한 개인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격들을 오가며 해리성 인격 장애(Deficient Identity Disorder, DID)를 연기한다. 영화의 결말과 전개에 대한 평가는 갈리지만 대체로 공통적인 감상 중 하나는 정신 장애에 대한 그의 표현이 상당히 인상 깊다는 것이다. 순간순간 표정과 태도를 전환하며 드러나는 각각의 ‘인격’은 해리성 인격 장애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간접적이지만 섬세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 이전에도 해리성 인격 장애를 주제로 한 대중 매체는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다. 그에 대한 명칭과 관점에서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지만, 해리성 인격 장애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내적 갈등과 다양성을 보여주기에 꽤나 흥미롭고 상당히 드라마틱한 주제이다.

해리성 인격 장애란?

다중 인격 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라고도 불렸고, 여러 매채에서 과장되어 혹은 왜곡되어 나타났지만, 기본적으로 해리성 인격장애는 한 사람에게 다수의 인격이 존재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와 동반하여 다른 방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기억의 상실이나 공백이 나타난다. 하지만 DID의 진단과 치료 방식에 대한 논란은 상당하다. 기본적으로 그들이 아동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경계선 성격장애, 연극성 성격장애 등과 같은 정신질환들과 상당히 높은 공병성을 보인다는 점과 절대적으로 적은 환자의 수, 그리고 질병에서 기인한 환자의 병리적인 상태 등으로 인해 연구 진행에 한계가 DID의 개념화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해리성 인격 장애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위해서는 '해리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조작적 정의가 뚜렷하지 않을뿐더러, 객관적인 측정방식이 아닌 자기보고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몇몇의 임상 연구와 사례 연구에서 정리된 내용에 따르면 해리성 인격 장애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두 종류의 접근으로 나뉜다. 1) 해리성 인격장애의 발병이 어린시절 혹은 유년기에 겪은 트라우마(여자 아이의 경우 성적인, 남자 아이의 경우 신체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로 인한 것이라는 '트라우마 기반 접근', 2) 해리성 인격 장애가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방식, 내담자 혹은 상담자의 기대, 그리고 사회 문화적인 영향으로 인해 나타난다는 '사회인지적인 접근'이다. 이 질병이 주로 미국에서 발병된다는 점과 더불어 여성이 남성에 비해 3~9배 정도 더 많이 진단된다는 점이 사회 인지적인 접근을 지지하는 하지만, 진단의 빈도수가 절대적으로 발병의 빈도수와 연결되지 않을 수 도 있다는 점과 – 환자들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DID에 부합하게 행동하거나 혹은 임상가가 그에 부합하는 증상에만 집중하여 진단하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음 – 여자아이의 성적 트라우마가 많은 경우 신체적 트라우마가 동반되는 점에서 한쪽으로 단정지을 수 없는 부분이다.

해리성 인격 장애와 기억 상실 증상

위 논문에서는 해리성 인격장애 환자들의 기억과 관련된 연구를 진행했다. 해리성 인격 장애 환자에게 존재하는 인격들 사이의 기억의 연속성이 부재하는 현상과 의도적인 잊음(directed forgetting)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았다.

해리성 인격 장애 환자가 기억 과정에서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은 한 인격에서 다른 인격으로 전환할 때 외현 기억이 사라지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외현적으로 단어들을 떠올려야 하는 과제를 줬을 때(예: pa_ _ _ 에서 per 채우기) 단어들에 대한 기억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암묵 기억은 인격 전환과 상관없이 유지되는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연구자가 앞서 제시했던 단어들과 제시하지 않았던 새로운 단어들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잠깐 보여준 후 그 단어를 쓰라고 했을 때, 처음보는 단어들보다 앞서 제시된 단어들을 더 잘 쓰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특징은 의도적인 잊음(directed forgetting) 효과에서 나타난다. 실험에서 연구자는 기억해야 할 단어(to-be-remembered words)와 잊어야 할 단어(to-be-forgotten words)를 제시한 후 각 단어들에 대한 기억을 측정하였다.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잊어야 할 단어보다 기억해야 할 단어를 더 잘 기억한다(directed forgetting 효과). 하지만 해리성 인격 장애 환자들은 한 인격 내에서 directed forgetting을 하지 못하고, 다른 인격으로 전환을 함으로써 directed forgetting을 수행한다. 보통 사람들이 통합된 하나의 인격 내에서 directed forgetting을 수행하며 기억을 형성할 때, 해리성 인격 장애 환자들의 경우 인격을 분리함으로써 기억도 분리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해리성 인격 장애 환자들의 기억 과정은 트라우마 환자들이 트라우마 사건을 기억해내지 못하지만 환영이나 꿈 등으로 고통받는 기억 양상과 일맥상통한 특징을 보이면서도, 다른 인격들이 내현적 기억(혹은 암묵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부분은 각 인격 간의 기억 연계성이 무시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결과는 앞서 얘기한 사회인지적 접근과 트라우마 접근 중 어떠한 가설만을 지지 하지도 혹은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해리성 인격 장애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흥미로운 기억 양상들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기억과 자아

기억과 망각은 인간의 자아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경험을 통해 형성한 외현적 혹은 내현적 기억은 인간이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양분이 되며 개개인의 역사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가 개인 고유의 특별한 자아를 형성한다. 따라서 공통되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개인은 서로 다른 자아로 해석되는 것이다. 망각이라는 것 역시 개인의 자아와 정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의 뇌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저장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잊음으로써 기존의 역사적 맥락과 통합적인 자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기억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이 고장 난다면 인간이 기능하는데 큰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 잊고자 하는 끔찍한 기억을 매 순간 맞이해야 하는 것, 겉으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적으로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것 모두 이상적인 심리 증상과 연결되어 있다. 불완전한 기억으로 인한 불안감은 일상생활에서도 종종 마주할 수 있다. 과음한 다음날 사라진 기억과 그에 대한 불안감은 누구나 흔히 경험할 수 있는 기억상실 아닌가. 더 나아가 기억의 장애는 통합적인 개인을 형성하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 기억은 개인이 각자의 세계를 구축하는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일생이 개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구축한 세계의 탄생과 멸망이라고 한다면, 기억과 인격은 그 세계를 만드는 주체이자 결과로서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스스로와 다른 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에 매료된 이로써, 기억과 인격은 – 특히 해리성 인격장애와 같은 편차는 –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주제이다. 이전에도 그래왔듯이 인간은 다른 사람에 대해 알아가면서 스스로에 대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발제논문: Elzinga, B. M., Phaf, R. H., Ardon, A. M., & van Dyck, R. (2003). Directed forgetting between, but not within, dissociative personality states. Journal of Abnormal Psychology, 112(2), 237-243.

- 발제조: 허아영, 윤다원, 오나은, 백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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